슬리퍼에서 운동화로

이음하지외과 2026-01-14 18:37 조회수 아이콘 23

슬리퍼에서 운동화로

 

2009525일 처음 저의 하지정맥류 전문 클리닉의 문을 연 이후, 수많은 다리와 마주해 왔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호주 시드니에서 오신 59세 정비사 환자분은 제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아 이 글을 써 봅니다.


진료실에 들어서던 환자분의 다리와 발은 오랜 하지정맥류로 검붉게 변해 있었습니다.

환자분은 멋쩍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시드니에서 정비 일을 하는데 서서 오래 일하면 발이 퉁퉁 부어올라서 운동화를 못 신고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있으면 사람이 좀 건들건들해 보이고 남들 보기에 예의 없어 보일까봐

가끔은 샌들을 신고 지냈습니다."


부기 때문에 터질 듯한 다리를 샌들에 밀어 넣으며,

그분이 견뎠을 불편함은 단순히 통증이 아니라 '품격'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술대에 누운 그분의 혈관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생각했습니다.

'이 다리로 시드니의 뜨거운 정비 현장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버텨내셨을까.'

 

제 손끝에는 16년의 임상 경험과 노하우가 있습니다.

하지정맥류 전문 클리닉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원칙이 있습니다.

박리다매식 수술이 아닌, 하루에 단 한 명, 혹은 두 명.

저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며 섬세하게 집도하는 집중 수술로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완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수술실의 조명이 켜지는 순간, 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의 혈관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환자에게는 '평생의 가벼움', 의사에게는 '의료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수술 후 경과를 보러 오신 환자분의 발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거기엔 샌들도, 슬리퍼도 아닌 단단히 끈을 묶은 운동화가 있었습니다.

 

"원장님, 이제 운동화를 신고 오래 걸어도 발이 안 부어요. 너무 가볍고 좋습니다!“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며 억지로 샌들에 발을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가벼워진 다리로 당당하게 운동화 끈을 묶고 다시 시드니의 일터로 돌아가실 뒷모습을 보며,

제가 왜 16년째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고장 난 일상을 다시 바로 세우는 일

저는 그 책임감을 안고 내일도 수술실의 조명을 켜겠습니다.

 

2026114

 

이음하지외과 원장 김동혁 올림